세계사』4종,『동아시아사』3종의 단원 구성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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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구성

다음은 실제 학교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세계사』4종,『동아시아사』3종의 단원 구성을 분석하여 보도록 하겠다.

<표 4="">,<표 5="">을 살펴보자면『세계사』4종,『동아시아사』3종 교과

서 모두 영역별 내용 체계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단원 구성이다.

『세계사』교과서의 경우 ‘아시아의 민족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이라는 내용

요소를 반영하여 3종의 교과서가 소단원명에 ‘근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비상『세계사』는 중단원‧소단원명에 ‘근대’ 라는 단어를 활용하지 않고 ‘개항과 조약 체제’ 라는 단어를 채택하여

이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표현하려 한 점을 눈여겨 볼 수 있다.

『동아시아사』교과서는 ‘근대화 운동과 국제 관계 변동’ 이라는 내용

요소 하의 단원인데도 3종 모두 소단원명에 ‘개항’ 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였다.

이는 개항을 동아시아 역사의 분기점에서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사』와『동아시아사』총 7종의 교과서 모두 중국의 근대화,혹은

중국의 개항을 이 대단원에서 다루는 동아시아 역사11)의 가장 첫 부분에배치하고 있다.

본고의 주제인 아편전쟁은 중국의 근대화 및 개항에서 가

장 먼저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므로 이 단원 구성은 중국의 근대,더 나

아가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은 중국과 서양을 막론한 중국사 연구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구분의 원점으로 인식되었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의 경우에는 제국주의 문제를 중시하는 애국자로서의 문제의식에서 1840년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해 왔고12),

서양의 역사학자들은서양만이 근대성을 중국에 가져다줄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므로 역시 중국근대사를 184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는 점차로 회의적인 시각에 직면하였다.전통과 근대를 구분

하는 패러다임 그 자체를 반박함으로써 아편전쟁의 ‘근대 획기성’에 의문을 품거나,

서양이 도래하기에 앞서 중국이 이미 많은 근대적 성격을 갖춘 진보하는 사회였다고 간주함으로써

중국의 근대에 대해 새로운 획기구분을 시도하는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아편전쟁이 중국 근현대사 전반

에 걸쳐 중요성을 갖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이 등장하고 있다.

14) 따라서 ‘서양의 공격에 의해 개시된’ 아편전쟁이 동아시아에 근대를열어 주었다는

기존의 외적‧수동적인 동아시아의 근대화론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아편전쟁 당시 시점에 청조가 보인 움직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조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청에 바치던 조공시스템을 완화하고15),

광동무역체제를 통해 지방에서 성장해 가고 있었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중앙 직할의 중상주의16) 정책을 취하여 광동무역에서 오는 관세수입을장악하려 하였다.

동아시아 조공시스템의 변화는 동아시아 근대의 시작을

서양의 외압에서 찾는 시각에 하나의 전환점을 줄 수 있고,

청 내부의 중앙과 지방의 대립은 아편전쟁을 국가 단위로 인식할 뿐 아니라 광동무역

체제와 외국 무역을 둘러싼 청조 내부의 권력투쟁으로도 시각을 전환하여볼 수 있다.

학계의 이러한 연구 성과를 살펴볼 때,

『세계사』,『동아시아사』교과서에서 아편전쟁을 근대의 획기로서 배치하는 현재의 구성은 다시금 고찰해 볼 여지가 있다.

제 1‧2차 아편전쟁 관련 서술 분석

III장에서는 『세계사』교과서 4종,『동아시아사』교과서 3종의 아편전쟁 관련 서술을 항목별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아편전쟁의 전사(前史)이자

아편전쟁의 무역전쟁적인 성격을 파악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수 있는 광동무역체제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는 아편전쟁에 있어 ‘아편’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에 대해 교과서 서술과 실제의 역사상을 비교하여 보도록 할 것이다.

1. 아편전쟁의 前史로서의 광동무역체제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청과 영국이 충돌하기 이전,청의 대외무역은 광

동무역체제 하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되었다.

1757년부터 청의 대외무역은

광주(廣州) 한 항구에 국한되었고 광동에서는 조정의 허가를 받은 독점상

인 공행(公行)18)이 서양 상인과의 교섭‧왕래‧서양 상인의 관리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이 광동무역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청과 영국의 무역 상황은

아편전쟁의 전사(前史)로서 교과서에 서술된다.이는 아편전쟁을 무역전쟁으로 서술하는 부분으로 볼 수 있으며,

아편전쟁이라는 명칭이 함의하는‘아편으로 인한 전쟁’을 넘어선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

광동무역체제,

그리고 아편 밀수출에 이르는 서사에 대한 각 교과서의상세한 서술을 <표 6="">에서 살펴보자.

대체로 모든 교과서가 아편전쟁의 전사(前史) 부분에서 광동무역체제하의 상황이 아편 무역으로 흘러간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광동무역체제가 제한된 무역 체제이며,공인을 받은 몇몇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이러한 체제 하에서 무역을 하던 영국이 무역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청 조정이 자유무역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아편을 밀수하게되었다고 서술하여,

아편전쟁의 발발 요인에 광동무역체제를 연결시킬 수있는 서술이 이루어져 있다.

『세계사』의 경우 금성의 교과서가 비교적 짧은 서술 안에서 주요 개념을 포괄한 서술이 이루어졌다.

교학사의 경우 광동무역체제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고,

광동무역체제에 대한 서술과 영국의 무역에 대한 서술이

문단이 나뉘며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여 광동무역체제를 아편전쟁의요인 중 하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천재의 서술은 영국이청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잘 드러남으로써 광동무역체제와 전쟁의 발발 배경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목할 부분은,

『세계사』교과서에서 광동무역체제에 불만을 가진 영국의 자유무역요구가19) 강조된 것에 비해 『동아시아사』3종은 영국 측의

자유무역요구에 대한 서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국가를주로 살피는 <동아시아사>교과의 특징상 영국을 타자화하여 서술한 것이

그 원인으로 생각된다.

무역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 측이 선행했던외교적인 노력에 대한 서술이 빠진 채,영국이 아편 밀수로

무역 적자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는 전개로 이어지는 것은 전쟁 발발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서술일 수 있다.

천재의 『동아시아사』는 광동무역체제에 대한 내용을 대단원 4. 동아

시아 세계의 지속과 변화의 소단원 4. 교역 관계의 변화와 은 유통 (165

쪽)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다른 교과서에 비해 아편전쟁의 전사로서의 광동무역체제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다.

이로 인하여아편전쟁의 전사로서 광동무역체제를 의식하기 어려운 한계가 보이므로,

간단한 언급으로라도 광동무역체제를 환기해 주는 것이 아편전쟁 발발의맥락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부분의 서술에서 아편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도록하겠다.

교학사『세계사』와 천재교육『동아시아사』는 영국의 아편 판매에 대해 ‘수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아편은 19세기의 청에

서 흡연‧수입‧생산‧유통이 모두 금지된 품목이었기에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을 전후로 한 시기 영국의 아편 수출은 명백한 불법이다.

20) 아편수입과 수출이 불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서술해야지만 이후 임칙서가 행한

강경한 아편 금지 조치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편이 불법이라는 사실이 적시되지 않는다면,이후 임칙서의 아편 금지 조치가 적법한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청측의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Source from http://crycrynono.tistory.co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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