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U의 그거알아?] episode 01 춘천 세발까마귀 락페스티벌

2015년 웹진 'the mute' 에 기고한 내용들을 순서대로 올립니다.

(현재는 폐간된 웹진이라 링크는 따로 안걸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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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코어매거진(CoreMagaZinE) 기타리스트 `RYU` 의 [그거알아?]

-prologue-

나라는 사람은 그렇다. 기타리스트로서 20년을 살았지만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적도 없고, 그렇다고 천재적인 감각을 갖고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 나는 그렇다. 소위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를 모두 겪으며 20년 가까운 음악 생활을 해왔지만, 찬사를 받을만 한 가시적인 업적도 없다.

그저 난 이 격동의 동네에서 열심히 헤엄치며 즐겼고, 헤매고 당했으며 넘어지고 또 버텼다.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겪었다.

평범하고 빛나지 않았던, 미생의 음악 인생이다.

99년에 `제1회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에서 밴드 코어매거진으로 `숨은고수`에 발탁이 되며 데뷰를 하였고, 2006년에 같은 페스티벌에서 밴드 `스타보우`로 또 `숨은고수`를 따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새 옷을 입은 `리뉴얼 코어매거진`으로 2012년 ebs 헬로루키 `올해의 루키` 대상을 거머쥐었다.

난데없는 수상의 나열이 과연 자랑일까? 99년 데뷰 이후, 세상을 뒤덮은 종말론이 물러가고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네 번씩의 월드컵과 올림픽이 개최되고, 내 나이가 20대를 지나 30대를 한참 지나고있는 지금 이시점에도 난 여전히 `루키`다. 데뷰때 같이 풋풋했던 동료들은 `넬`이 되었고 `피아`가 되었으며 후배들은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가 되었다.

이 죽일놈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굴곡많은 음악 인생에 남은 것이라면 `시간이 준 경험`과 `칠전팔기가 준 끈기` 그리고 `보물같은 스토리`가 남았다. 앞에 두가지는 음악으로 풀어내고 있으니 그 `스토리`를 공유하고자 한다.

내가 겪은 얘기지만 개인사는 아니다. 내가 보고 들은, 자랑할 만한 기억력 안에서 보물처럼 간직되고 있던, 그저 어디에서도 다루워진 적이 없었던 ‘지난 얘기’ 쯤으로 대해주면 좋겠다.

민감 혹은 민망한 얘기들은 반드시 당사자에게 사전 허락, 확인을 받을 것임을 밝힌다.

episode 01 - 세발까마귀 락페스티벌

1998년 여름, 춘천 공지천 야외무대에 `잡지에서나 보던` 밴드 십여 팀이 모였다. 사일런트아이, 도깨비 등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의 메탈파, 크라잉넛, 레이지본 등 총 천연색 염색 머리의 펑크파, 꾸밀줄 몰랐던 순수 뮤지션 로컬파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대학밴드들. 필자는 한 대학의 기타리스트로 `이도저도 아닌`파에 속해 있었다. `저 사람들 크라잉넛이다!.`, `프로들은 헤드뱅잉을 하면서도 어지러워하지 않는구나` 등의 바보같고 수줍은 속닥거림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던 우리들 옆에선 친구들이 국수를 삶고 있었다. 국수? 그렇다. 이 페스티벌은 철저한 민간 자본과 민간 기획의 결과물이었다. 이를테면, 기획단의 중앙에는 당구장을 운영해서 모은 돈으로 라이브 클럽을 차려 홀랑 말아먹고, 다시 콜라텍으로 돈을 모아 또 클럽이나 페스티벌을 열어 퍼펙트하게 날려먹는, 정말이지 음악과 밴드에 환장한 형님이 한 분 계셨고(춘천 라이브 클럽 `락우드` 사장), 그를 도와 락페스티벌에 인생을 건 무용수 출신의 기획자 `연운` 형님이 계셨다. 물론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두 사람의 역할이 가장 컸다. 거의 이 둘이 다 했다. 이 말인 즉슨, 공연 페이나 진행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만큼 열악했다는 것이다. 음향과 조명장비를 위한 비용이 마련되면 그 다음은 말로 풀었다. `춘천은 이러이러하다. 와달라. 서달라.` 따라서, 현장에서 밴드들이 먹을 식사는 자봉단이 즉석에서 삶는 국수가 전부였고 게런티는 공연 종료 후 숲속 산장에서 열린 바베큐 파티였다.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종일 락음악을 연주한 후 산속에서 파티라니! 이보다 멋질순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과 경제논리 따위는 관심도 없던, 아니 그냥 몰랐다.

[홈페이지가 사라져 당시의 자료는 찾을 수 없기에 2005년의 웹포스터로 대신한다. 출처_'사과'님 블로그]

98년에 춘천 클럽 락우드에서 데뷔 후, 이듬해 99년에 홍대씬에 진출 하고서도 3년간 이 페스티벌을 도와 일했다. 난 섭외 담당. 이때 맺어진 인연(닥터코어 911, 와이낫, 프리마켓 외 다수)이 지금까지도 함께 활동하는 오랜 동료들이 되었다.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한 이 페스티벌의 규모는 점점 줄었다. 춘천 최대의 공터로인 공지천 야외무대에서 어린이회관 (지금의 춘천 상상마당) 야외무대로, 이후엔 대학교 강당에서 춘천 명동의 좁은 거리로까지 갔다고 한다.

춘천락페스티벌에서 세발까마귀 락울음제로, 또 세발까마귀 락페스티벌로 이름이 바뀌면서 십년 가까이 유지되었던 이 축제는 무용수 출신의 기획자 `연운` 형님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그 막을 내린다. 비상하지 못한 세발까마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이미 이런 중소규모의 락 콘서트들이 자주 열리고 있었지만, 로컬 밴드는 몇 팀 되지도 않는 락음악의 불모지 춘천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홍보의 방법을 몰랐기에 무작정 1톤 트럭에 올라 연주를 하며 시내를 돌았다.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 뮤직비디오에서 처럼 군중의 박수나 환호 따위는 없었다. 신호대기에 걸린 옆 차선 버스 승객들의 비웃음이 있을 뿐.이런 눈물겨운 시도가 비단 춘천에서 뿐이었겠는가. 우린 정말 발악했다.

이 전설과도 같은 `짠한` 페스티벌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최자인 클럽 락우드 사장님은 춘천을 떠났고, 클락우드의 디제이는 음악잡지 기자를 거쳐 현재는 국내 대표 음원회사의 팀장이 되었으며, 국수를 삶던 친구들 중 몇은 문화콘텐츠 기획자로서의 삶을 살고있다.

그리고 난 지금 이렇게 그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4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춘천밴드페스티벌` 이라는 것이 국카스텐, 노브레인, 봄여름가을겨울, 시나위, H2O, 코어매거진 등 화려한 라인업과 함께 탄생했다. 세발까마귀의 부활이라 믿고싶다. 부디 오래도록 살아남아, 하늘에서 굽어 볼 무용수의 한을 풀어주길.

Rest in peace 연운.

-RYUniverse -


Source from http://ryuniverse.tistory.com/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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